성분표를 읽을 수 있다는 것
화장품 용기 뒷면에는 작은 글씨로 성분 목록이 적혀 있다. 대개는 그냥 지나친다. 이름이 낯설고,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제수, 부틸렌글라이콜, 나이아신아마이드, 페녹시에탄올. 한 줄 한 줄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화장품인지 화학 실험 재료인지 헷갈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성분표 앞에서 둘 중 하나를 택한다. 쳐다보지도 않거나, 아니면 좀 읽어 보다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포기하거나.
이 강의는 세 번째 길을 위한 것이다. 외계어처럼 보이는 그 목록에는 사실 질서가 있다. 어떤 성분이 얼마나 들었는지, 어떤 규칙에 따라 기재가 되는지 정해진 문법이 있다. 그 문법을 익히고 나면 성분표는 더 이상 암호가 아니라, 제품의 자기소개가 된다.
시작하기 전에 오해 하나를 짚고 가자. 긴 화학명이 많으면 위험한 화장품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도 화학명으로 적으면 ‘디하이드로젠 모노옥사이드’가 되고, 소금은 ‘염화나트륨’이 된다. 이름이 어렵다고 위험한 것이 아니다. 독성을 결정하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양이다. “독은 양이 만든다”는 말은 독성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런데 유럽 8개국 5천여 명을 조사한 2019년의 한 연구에서, 응답자의 열에 아홉은 독성이 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화학에 대한 막연한 불안, 케미포비아(chemophobia)는 이렇게 무지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성분표에는 규칙이 있다
섹션 제목: “성분표에는 규칙이 있다”화장품 뒷면에 모든 성분을 적도록 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한국은 2008년부터 이른바 전성분 표시제를 시행했다. 그 전에는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는 일부 지정 성분만 적으면 됐지만, 지금은 제조에 쓴 성분을 원칙적으로 모두 표시해야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소비자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성분을 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분을 적는 데에는 두 가지 핵심 규칙이 있다. 이 둘만 알아도 성분표가 주는 정보의 절반은 알게 되는 셈이다.
첫째, 많이 든 것부터 적는다. 요리 레시피를 떠올리면 쉽다. 재료를 양이 많은 순서대로 적어두면, 맨 위가 그 요리의 바탕이고 아래로 갈수록 양념에 가까워진다. 성분표도 같다. 그래서 토너나 로션의 첫 줄은 거의 언제나 ‘정제수’, 곧 물이다. 화장품의 상당수는 부피의 60%에서 많게는 90%가 물이다. 물이 1등이라는 사실에 속았다고 느낄 필요는 없다. 물은 다른 성분을 녹여 피부에 전하는 바탕이며, 왜 물이 늘 맨 앞에 오는지는 뒤에서 따로 다룬다.
둘째, 아주 적게 든 성분은 순서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함량이 1% 이하인 성분과 향료, 색소는 적는 순서가 자유롭다. 미량으로 들어간 성분의 정확한 순위까지 밝히라고 하면 제조사의 배합 비율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분표는 사실상 두 토막으로 나뉜다. 앞쪽의 ‘1%보다 많은 구간’은 양이 많은 순서가 지켜지지만, 뒤쪽의 ‘1% 이하 구간’은 순서가 함량을 뜻하지 않는다.
이 두 규칙을 알면 작은 추리가 가능해진다. 광고에서 내세우는 성분이 목록의 어디쯤 있는지 보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정밀한 저울이 아니라 대략의 눈금이라는 점은 기억해 두자.
성분은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섹션 제목: “성분은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성분표에 스무 개, 서른 개의 이름이 늘어서 있어도 겁먹을 것 없다. 기능으로 묶으면 손에 꼽을 만큼 줄어든다. 화장품 한 통은 대체로 이런 식구들로 이루어진다.
바탕이 되는 물이 있다. 매끄럽게 펴 발리고 수분을 채우는 유성 성분, 곧 오일과 왁스가 그다음이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것들을 이어주는 계면활성제, 묽은 액체를 크림처럼 되직하게 만드는 점증제도 들어간다. 피부의 수분을 붙잡는 보습제와 제품이 상하지 않게 지키는 방부제가 있고, 미백이나 주름 개선 같은 효과를 노리는 활성성분, 색과 향을 입히는 색소·향료가 더해진다.
화장품 한 통의 성분을 기능별로 묶은 그림 — 물·유성 성분·계면활성제·점증제·보습제·방부제·활성성분·색/향
흥미로운 점은, 이 식구들이 성분표에서 앉는 자리가 대체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물은 거의 언제나 맨 앞이다. 오일과 보습제는 앞쪽에서 중간에 걸쳐 있다. 점증제나 방부제는 적은 양으로도 제 역할을 하므로 보통 뒤쪽에 적힌다. 색소는 흔히 맨 끝에 따로 모인다. 그러니 자리만 보고도 그 성분이 제품의 바탕인지 양념인지 어림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오해를 풀어 두자. 성분 개수가 많으면 복잡하고 나쁜 화장품이라는 생각이다. 성분의 수는 좋고 나쁨의 잣대가 아니다. 제형에 따라, 사용감에 따라, 안정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성분은 자연스럽게 늘기도 줄기도 한다. 물 한 가지로도 자극이 생길 수 있고, 성분 서른 개짜리 제품이 오래도록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개수가 아니라 무엇이 어떤 목적으로, 얼마나 들었는가다.
그래서, 성분표를 읽는다는 것
섹션 제목: “그래서, 성분표를 읽는다는 것”성분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해독하는 일이 아니다. 과장된 광고와 근거 없는 공포, 그 사이의 어디쯤에서 스스로 판단할 근거를 얻는다는 의미이다. ‘무첨가’라는 글자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앞자리에 놓인 성분이 정말 핵심인지, 뒤쪽에 작게 적힌 성분이 사실은 이 제품의 주인공인지와 같은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지금 당장 모든 이름을 알 필요는 없다. 이 강의가 앞으로 할 일이 바로 그것이다. 원자와 분자에서 시작해, 물과 기름이 왜 섞이지 않는지, 계면활성제가 어떻게 그 둘을 잇는지, 효소가 어떻게 묵은 각질만 골라 녹이는지를 차례로 풀어갈 것이다. 이름이 -올로 끝나는 성분들의 정체도, 모두가 무서워하는 방부제의 진실도 그 길 위에 있다.
그리고 마지막 강의에서, 우리는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온다. 오늘 외계어처럼 보였던 라벨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그 목록은 암호가 아니라, 충분히 해석이 가능한 한 편의 글이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