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부와 보존
화장품 매대에서 ‘파라벤 프리’라는 글자를 보면 마음이 놓인다. 나쁜 것을 빼낸 제품 같고, 그만큼 더 안전해 보인다. 그런데 이 직관을 한번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파라벤을 뺀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제품이 상하지 않게 지키던 일을 누군가는 대신해야 하므로, 그 빈자리에는 다른 방부 성분이 들어온다. 문제는 그 새 성분이 파라벤보다 덜 검증된 경우가 적지 않다는 데 있다. 실제로 파라벤을 기피하는 흐름 속에서 대체 성분 때문에 접촉 알레르기가 늘었고, 아예 방부제를 빼버린 ‘무방부제’ 제품에서는 세균 오염으로 회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프리’가 곧 ‘더 안전’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방부제만큼 오해를 많이 받는 성분도 드물다. 0강에서 던져둔 질문, “방부제는 정말 나쁜가”에 답할 차례다. 답을 미리 말하자면, 나쁜 것은 방부제가 아니라 방부제 없이 상해버린 제품이다. 왜 그런지 차근차근 풀어 보자.
화장품도 음식처럼 상한다
섹션 제목: “화장품도 음식처럼 상한다”방부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길은 음식을 떠올리는 것이다. 식탁에 둔 우유는 며칠이면 상하지만, 잼이나 꿀은 몇 년을 둬도 멀쩡하다. 차이는 물에 있다. 정확히는 미생물이 쓸 수 있는 물이 얼마나 되느냐에 있다.
세균과 곰팡이도 자라려면 물과 먹이가 필요하다. 화장품은 이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토너나 로션은 부피의 상당 부분이 물이고, 보습을 위해 넣은 글리세린이나 식물 추출물은 균에게는 훌륭한 먹이다. 거기에 욕실의 습한 공기, 매일 뚜껑을 열고 손가락을 담그는 습관까지 더해지면, 화장품 한 통은 균을 키우는 배양접시에 가까워진다. 잼이 안 상하는 건 설탕이 물을 단단히 붙들어 균이 쓸 물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 ‘쓸 수 있는 물의 양’을 숫자로 나타낸 것이 수분활성도(water activity), 줄여서 aw다. 순수한 물이 1.0이고 바짝 마른 상태가 0이다. 경험칙은 단순하다. aw가 0.6 아래로 내려가면 거의 모든 미생물이 자라지 못하고, 곰팡이는 0.7 근처까지 버틴다. 그래서 보존 설계의 한 축은 이 aw를 낮추는 일이다. 보습제를 충분히 넣어 물을 붙들면 균이 쓸 자유로운 물이 줄어든다. 다만 물이 주인공인 화장품에서 aw를 잼처럼 0.6까지 떨어뜨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aw 조절만으로는 모자라고, 결국 방부제가 필요해진다.
수분활성도(aw) 눈금 막대 — 1.0 순수한 물 / 0.7 곰팡이 한계 / 0.6 미생물 증식 한계 / 0 건조. 우유·화장품·잼·꿀의 대략적 위치 표시
여기서 4강에서 다룬 pH가 다시 등장한다. 많이 쓰이는 방부제는 약산성, 대략 pH 5.5 이하에서 효과가 가장 좋다. 화장품을 약산성으로 맞추는 데에는 피부 결을 고려한 이유도 있지만, 방부가 잘 되게 하려는 설계 의도도 함께 깔려 있다. 보존은 방부제 한 가지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pH와 aw, 방부제를 함께 맞추고 마지막에 균을 일부러 넣어 잘 버티는지 시험하는—챌린지 테스트라 부르는—과정을 거친 하나의 시스템이다.
방부제는 무엇이고 얼마나 들어가나
섹션 제목: “방부제는 무엇이고 얼마나 들어가나”가장 잘 알려진 방부제가 파라벤이다. 파라벤은 한 종류가 아니라 메틸·에틸·프로필·부틸파라벤처럼 한 가족을 이루는 성분군이다. 이들은 균의 세포막과 에너지 대사를 교란해 증식을 막는다. 들어가는 양은 대개 0.015%에서 0.3% 사이로, 백분율 소수점 자리의 미량이다.
또 하나 흔한 것이 페녹시에탄올이다. 미생물의 세포막을 무너뜨려 안에 있어야 할 물질을 새어 나가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다만 혼자서는 막을 수 있는 균의 범위가 좁아 보통 다른 방부 성분과 짝지어 쓴다. 이 밖에 소르브산 같은 유기산, 포름알데히드를 천천히 내놓는 방출형 성분, 강력하지만 알레르기가 잦은 이소티아졸리논 계열 등이 있다.
여기서 핵심은 ‘얼마나’다. 방부제는 균에게는 충분히 독하되 사람에게는 안전역을 두도록 농도가 정해지고, 그 한도는 규제기관이 정한다. 한국 식약처 기준으로 파라벤은 한 종류만 쓰면 0.4%, 여러 종류를 섞으면 합계 0.8%까지다. 페녹시에탄올은 1%가 상한이다. 유럽도 파라벤 합계 0.8%로 비슷하고, 페녹시에탄올은 영유아를 포함해 1.0%까지 안전하다는 것이 EU 과학위원회(SCCS)의 결론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파라벤을 금지하지 않으며, 성분 안전성을 검토하는 민간 기구 CIR도 안전하다고 판정했다. 식약처·FDA·CIR·SCCS, 어디를 봐도 허용 농도 안의 파라벤은 안전하다는 데 의견이 모인다.
| 방부 성분 | 사용 한도 (한국 식약처 기준) |
|---|---|
| 파라벤 (단일 사용) | 0.4% |
| 파라벤 (혼합 사용) | 합계 0.8% |
| 페녹시에탄올 | 1% |
출처: 식약처 화장품 안전기준 규정 / 정밀 인용 전 현행 고시 원문 대조 권장
그래서, ‘파라벤 프리’는 무엇을 뜻하나
섹션 제목: “그래서, ‘파라벤 프리’는 무엇을 뜻하나”이쯤에서 파라벤 공포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짚어야 한다. 발단은 2004년의 한 연구였다. 유방 종양 조직에서 파라벤이 검출됐다는 내용이 알려지며 ‘파라벤이 암을 일으킨다’는 인상이 퍼졌다. 그러나 이 연구는 정상 조직과 비교할 대조군이 없었고, 검출됐다는 사실만으로 원인이라 말할 수 없었으며, 검출된 양도 10억분의 1 수준의 극미량인 데다 시료가 오염됐을 정황까지 있었다. 검출과 인과는 다른 말이다. 이후 어떤 규제기관도 파라벤을 발암물질로 인정하지 않았고, 미국 암학회 역시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
파라벤이 호르몬을 흉내 낸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이긴 하다. 파라벤은 약한 에스트로겐 유사 활성을 가진다. 다만 ‘약한’의 정도가 관건이다. 우리 몸의 에스트로겐과 견주면 그 세기가 수만 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호르몬 하나가 할 일을 파라벤 수만 개가 달려들어야 흉내 낼까 말까 한 수준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유럽이 파라벤 5종을 금지했다”는 말은 뭘까. 이 대목이 가장 자주 오해된다. EU는 2014년 이소프로필·이소부틸·페닐·벤질·펜틸파라벤 5종의 사용을 금지했다. 하지만 사유는 ‘위험하다고 입증돼서’가 아니다. 업계가 이 다섯 종의 안전성 자료를 거의 제출하지 않아 평가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자료가 없으니 목록에서 빼겠다는 행정 조치였던 셈이다. 정작 가장 널리 쓰이는 메틸·에틸·프로필·부틸파라벤은 지금도 허용된다. ‘금지’라는 단어만 떼어 보면 위험이 확정된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자료 미제출에 따른 절차적 결정이다.
문제는 이 공포가 빈자리를 만든다는 데 있다. 검증이 두텁게 쌓인 파라벤을 빼자 그 자리를 메틸이소티아졸리논 같은 다른 방부제가 채웠고, 그 결과 접촉 알레르기가 눈에 띄게 늘었다.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이 성분의 알레르기 유병률이 한 자릿수 후반에서 10%대까지 보고됐다. 검증된 베테랑을 내보내고 덜 검증된 신입을 앉힌 셈인데, 이를 ‘후회스러운 대체’라 부른다. 더 나아가 방부제를 아예 뺀 ‘무방부제’ 제품에서는 녹농균 같은 병원균이 자라 회수되는 일까지 생겼다. 보존에 실패하면 위생 위험이 따라온다는—말하자면 무방부제의 역설이다.
물론 이것이 ‘방부제는 무조건 안전하고 좋다’는 뜻은 아니다. 이소티아졸리논처럼 실제로 알레르기 위험이 큰 성분도 있고, 위험의 크기는 성분마다 다르다. 특정 성분에 이미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 성분을 뺀 ‘프리’ 제품이 분명 의미가 있다. 다만 ‘파라벤 프리’라는 글자 자체가 안전의 보증서는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제품이 어떤 방부 시스템으로 챌린지 테스트를 통과했느냐다.
다음 강 예고
섹션 제목: “다음 강 예고”방부제가 제품을 지키는 안전장치라면, 그 옆 칸에는 피부에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성분들이 있다. 미백, 주름 개선, 진정을 노리는 활성성분이다. 다음 강에서는 이 활성성분이 정말 광고만큼 일하는지, 농도와 흡수와 안정성이라는 조건을 따라 들여다본다. 20강에서 만난 항산화제도 그 자리에서 다시 등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