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용기 입문 — 이름 끝 글자로 성격을 읽는다
토코페롤, 판테놀, 살리실산, 아이소프로필 미리스테이트. 성분표에 늘어선 이런 이름들은 여전히 외계어처럼 보인다. 그런데 화학을 조금 아는 사람은 이 이름들을 끝에서부터 읽는다. 토코페’롤’과 판테’놀’은 물을 좋아하겠다, 살리실’산’은 산이겠다, 미리스테’이트’로 끝나는 저것은 기름 같은 오일이겠다 — 이름의 마지막 글자만 보고도 그 성분의 성격을 어림한다.
점쟁이가 아니다. 분자에는 이름 끝으로 새어 나오는 성격이 있고, 그것을 읽는 규칙이 있을 뿐이다. 이 강의는 그 규칙의 입문이다. 일종의 성분 관상법이라 불러도 좋다.
성격을 정하는 건 골격이 아니라 거기 붙은 부위다
섹션 제목: “성격을 정하는 건 골격이 아니라 거기 붙은 부위다”앞 강에서 탄소를 다뤘다. 탄소는 서로 길게 손을 잡아 사슬과 고리를 만드는 재주가 있어서, 유기화합물의 뼈대 노릇을 한다. 그런데 이 탄소-수소로만 이루어진 뼈대는 의외로 무던하다. 화학적으로 말수가 적다. 물과 딱히 친하지도 않고, 쉽게 반응하지도 않는다.
분자의 성격을 정하는 것은 이 조용한 뼈대가 아니라, 거기에 붙은 작은 부위다. 산소나 질소가 낀 몇 개의 원자 묶음이 분자 끝에 매달리면, 그 순간 분자는 물과 친해지거나, 산이 되거나, 다른 분자와 잘 반응하는 성질을 띤다. 유기화학 교재는 이 부위를 작용기(functional group)라 부른다. “특징적인 반응성을 보이는 작은 원자 묶음”이라는 것이 교과서의 정의다. 핵심은, 같은 작용기는 어느 분자에 붙어 있든 거의 늘 비슷하게 행동한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작용기는 옷에 다는 단추 같은 것이다. 똑같은 정장 한 벌이라도 어떤 단추와 배지를 다느냐에 따라 격식 있는 차림이 되기도 하고 편한 차림이 되기도 한다. 긴 탄소 사슬이라는 옷 자체는 비슷해도, 끝에 무엇이 달리느냐로 분자의 성격이 갈린다. 그래서 성분표의 길고 복잡한 이름에 겁먹을 필요가 없다. 그 긴 이름의 대부분은 탄소 사슬의 길이와 모양을 묘사하는 부분이고, 정작 성격을 쥔 것은 끝에 달린 작은 단추 하나다. 이름이 길다고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0강의 이야기가 여기서 한 번 더 확인된다.
단추는 네 종류만 알아도 된다
섹션 제목: “단추는 네 종류만 알아도 된다”작용기는 종류가 많지만, 화장품 성분표를 읽는 데 먼저 익혀 둘 만한 단추는 넷이다.
먼저 하이드록시기, 기호로 -OH다. 산소와 수소가 붙은 이 단추는 물과 잘 어울린다. 산소가 전자를 강하게 끌어당겨 이 부위가 한쪽으로 치우친 성질, 즉 극성을 띠기 때문이다. 그 덕에 물 분자와 손을 잡는 수소결합이 가능해진다(3강). -OH가 붙은 분자를 알코올이라 부르며, 대체로 물과 친하고 수분을 끌어당기는 쪽으로 일한다.
카복실기 -COOH는 정반대 위치에 있다. 이 단추가 달린 분자는 산성을 띤다. 끝의 수소 하나를 H⁺로 비교적 쉽게 내놓기 때문인데, H⁺를 내놓는 쪽이 산이라는 이야기는 4강에서 다뤘다. 이름이 ‘-산’으로 끝나는 성분들이 대개 이 단추를 달고 있다.
질소가 낀 아민 -NH₂는 거꾸로 H⁺를 받는 쪽, 즉 염기 쪽 성격을 띤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자. 아민이라는 단추가 달렸다고 그 성분이 무슨 일을 하는지 한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다. 화장품에서 질소를 가진 성분은 산도를 조절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 아미노산이나 펩타이드처럼 전혀 다른 자리에 놓이기도 한다. 단추의 종류는 성격의 힌트이지, 용도의 정답표가 아니다.
마지막 에스터는 조금 다른 식구다. 산(카복실기)과 알코올(하이드록시기)이 만나 결합한 형태인데, 둘이 손을 잡으면서 카복실기의 산성도 하이드록시기의 강한 극성도 누그러진다. 그래서 긴 탄소 사슬을 가진 에스터는 대체로 덜 극성이고 기름에 가깝다. 화장품에서 부드럽게 발리는 오일류 상당수가 이 집안이다. 그렇다고 에스터가 모두 기름 같은 것은 아니어서, 사슬이 짧은 작은 에스터는 향료처럼 가볍게 날아가기도 한다. 단추 하나로 모든 것이 정해지지는 않는다는 단서를 여기서도 붙여 둔다.
-OH·-COOH·-NH₂·에스터를 짧은 사슬 끝에 붙인 네 단추 — 물쪽·산·염기쪽·기름쪽. (이미지: Wikimedia Commons, CC BY 4.0)
이름 끝 글자가 단추를 알려준다
섹션 제목: “이름 끝 글자가 단추를 알려준다”여기까지 오면 처음의 관상법이 가능해진다. 분자에 이름을 붙이는 국제 규칙에는, 그 분자에서 가장 두드러진 작용기를 이름 끝에 접미사로 드러내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렇게 읽힌다. 이름이 ‘-올’로 끝나면 하이드록시기(-OH), 곧 알코올이다. ‘-산’으로 끝나면 카복실기(-COOH)다. ‘-아민’으로 끝나면 아민, ‘-에이트’로 끝나면 에스터다. 그래서 토코페롤·판테놀은 -OH를 단 알코올 집안, 살리실산·글라이콜산은 -COOH를 단 산 집안, 아이소프로필 미리스테이트는 에스터 집안임을 이름만 보고 짐작할 수 있다. 0강에서 “이름이 -올로 끝나는 것들”이라며 미뤄 둔 이야기의 답이 바로 이것이다. -올은 -OH라는 단추의 신호다.
에스터의 이름은 조금 특이하게, 두 단어로 적힌다. 알코올 쪽을 앞에, 산 쪽을 뒤에 ‘-에이트’로 붙인다. 아이소프로필 미리스테이트라는 이름은 아이소프로필 알코올과 미리스트산이 만나 만들어진 에스터라는 뜻이다. 이름이 그 분자의 출신을 그대로 적어 둔 셈이다.
그래서, 관상법은 짐작까지다
섹션 제목: “그래서, 관상법은 짐작까지다”이 읽기 규칙은 분명 쓸모가 있다. 다만 점이 아니라 짐작이라는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접미사는 어디까지나 힌트일 뿐, 어기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예가 나이아신아마이드다. 이름에 ‘아마이드’가 들어 있어 아민 집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분자가 단 단추는 자유로운 아민(-NH₂)이 아니라 카복스아마이드라는 다른 부위다. 이름이 한 끗 차이인 나이아신은 또 다르다. 나이아신은 카복실기(-COOH)를 단 산이다. 나이아신과 나이아신아마이드, 이름은 거의 같은데 단추가 다르다. 이름만 보고 성격을 단정했다가는 헛다리를 짚기 쉽다는 이야기다.
글리세린도 비슷한 함정이다. 하이드록시기를 셋이나 단 알코올인데, 시중에서 부르는 이름은 ‘-올’로 끝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쓰던 관용적인 이름이 그대로 굳었기 때문이다. 화장품 성분에는 이렇게 라틴어나 옛 관용명에서 온 이름이 섞여 있어서, 접미사 규칙을 늘 따르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름 끝 글자는 “이 성분은 아마 이런 성격이겠다”는 첫 짐작을 주는 도구로 쓰면 된다. 정확한 구조가 궁금하면 성분 데이터베이스에서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 관상이 사람을 다 말해 주지 못하듯, 이름이 분자를 다 말해 주지는 않는다.
다음 강 예고
섹션 제목: “다음 강 예고”오늘 익힌 네 개의 단추는 앞으로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간다. 다음 강에서는 ‘-산’으로 끝나는 지방산을 본다. 스테아르산이나 올레산의 머리에 달린 그 -COOH가 화장품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또 그것이 글리세린과 만나 어떻게 오일이 되는지를 다룰 것이다. 그다음에는 ‘-올’로 끝나는 알코올의 차례다. 같은 -OH를 달고 있는데 왜 어떤 알코올은 피부를 말리고 어떤 알코올은 오히려 촉촉하게 하는지 — 단추가 같아도 분자가 다르면 행동이 갈리는 그 이야기를, 오늘 깔아 둔 관상법 위에서 풀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