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와 분자 — 외계어의 알파벳
성분표를 처음 읽으려 들면 가장 먼저 막히는 곳이 이름이다. 나이아신아마이드, 부틸렌글라이콜, 토코페릴아세테이트. 발음조차 버거운 이름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 사이에 H₂O 같은 화학식이라도 끼어 있으면, 이건 화장품이 아니라 실험실 물질 같다는 인상이 굳어진다. 0강에서 짚었듯, 이름이 어렵다고 위험한 것은 아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그 공식을 이해하면 편안해진다.
이 강의의 목표는 그 공식의 기본 틀을 공부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길고 낯선 이름들은 전부 같은 부품으로 만들어진 조립품의 이름표다. 부품의 종류는 생각보다 적다. 피부에 바르는 화장품이든, 매일 마시는 물이든 간에 세상 모든 물질은 백 가지 남짓의 같은 블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블록 한 개 — 원자
섹션 제목: “블록 한 개 — 원자”레고를 떠올리면 쉽다. 통 안에 빨간 블록, 파란 블록, 길쭉한 블록이 섞여 있다. 이 블록 하나하나가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 곧 원자다. 더 쪼개면 레고가 아니라 그냥 플라스틱 부스러기가 되듯, 원자도 화학적으로는 더 쪼갤 수 없는 마지막 알갱이다.
블록의 종류를 가르는 기준은 딱 하나다. 원자 한가운데 핵 속에 든 양성자의 수가 블록의 종류를 정한다. 양성자가 하나면 수소, 여섯이면 탄소, 여덟이면 산소다.
블록을 붙이면 분자가 된다
섹션 제목: “블록을 붙이면 분자가 된다”블록은 혼자 있을 때보다 붙어 있을 때 쓸모가 생긴다. 원자 여러 개가 결합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 것, 그것이 분자다. 물 한 방울을 한없이 쪼개 들어가면, 더 쪼개면 물이 아니게 되는 마지막 단위에 닿는다. 그 단위가 물 분자다.
분자를 적는 방법이 바로 그 무서워 보이던 화학식이다. 겁낼 것이 못 된다. 화학식은 조립 설명서 맨 앞에 붙은 부품 표일 뿐이다. H₂O를 보자. H는 수소, O는 산소를 가리키는 기호다. H 뒤에 붙은 작은 2는 수소 블록이 2개라는 뜻이고, O 뒤에는 숫자가 없으니 산소 블록은 1개다. 그러니 H₂O는 “수소 블록 2개 + 산소 블록 1개”라고 적은 부품 표에 지나지 않는다. 포도당의 화학식 C₆H₁₂O₆도 마찬가지다. 탄소 6개, 수소 12개, 산소 6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H₂O는 수소 블록 2개와 산소 블록 1개가 붙은 부품 표다
다만 부품 표는 무엇이 몇 개인지만 알려줄 뿐, 그것들이 어떻게 붙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블록을 어떤 식으로 끼우느냐에 따라 같은 부품으로도 다른 물건이 나온다. 화학식이 같아도 결합 방식이 다르면 전혀 다른 물질이 되는 일이 실제로 있는데, 이 이야기는 뒤에서 따로 다룬다. 블록끼리 정확히 어떻게 붙는가—그 결합의 방식이 다음 강의의 주제다.
백 가지 남짓의 블록, 그 목록이 주기율표
섹션 제목: “백 가지 남짓의 블록, 그 목록이 주기율표”학창 시절 주기율표를 외우다 질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기율표는 본래 외우라고 만든 표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블록의 품목을 빠짐없이 적어 둔 재료 창고의 목록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원소는 모두 118종이다. 이 가운데 자연에서 발견되는 것이 약 90여 종이고, 나머지는 실험실에서 인공으로 만들어 낸 것들이다. 인공 원소라는 말에 겁먹을 필요는 없다. 대부분은 만들어지자마자 사라질 만큼 수명이 짧아 화장품은커녕 일상의 어떤 물건과도 인연이 없다. 우리가 쓰는 물질은 거의 다 자연에 흔한 블록들로 지어진다.
목록을 정리한 순서에도 뜻이 있다. 원소는 양성자 수가 적은 것부터 차례로 번호가 매겨져 있고—이 번호가 원자번호다—같은 세로줄에 놓인 원소들은 성질이 서로 닮는다. 그래서 주기율표는 단순한 명단이 아니라, 비슷한 성질의 블록을 같은 칸에 모아 둔 진열대에 가깝다. 어느 칸에서 무엇을 꺼내 쓸지 한눈에 보이도록 만들어둔 카탈로그인 셈이다.
그래서 화장품에서는?
섹션 제목: “그래서 화장품에서는?”화장품 한 통이 쓰는 블록은 이 창고 목록 가운데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성분은 탄소(C)·수소(H)·산소(O)·질소(N), 이 네 가지를 중심으로 짜인다. 여기에 나트륨(Na)이나 아연(Zn), 티타늄(Ti) 정도가 이따금 더해진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몸도 다르지 않다.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의 대략 96%가 같은 네 원소로 되어 있다. 피부에 바르는 것이나 피부를 이루는 것이나, 결국 같은 블록 통에서 나온다.
이제 0강에서 외계어처럼 보이던 이름들로 돌아가 보자. 성분표 첫 줄의 정제수는 H₂O, 곧 수소 둘과 산소 하나다. 보습제로 흔히 쓰이는 글리세린은 C₃H₈O₃탄소 셋, 수소 여덟, 산소 셋의 조합이다. 발음이 가장 험한 축에 드는 나이아신아마이드조차 뜯어 보면 C₆H₆N₂O, 탄소·수소·질소·산소 네 블록이 모인 이름일 뿐이다. 길고 낯선 이름은 위험의 표식이 아니라, 어떤 블록이 몇 개 모였는지를 적은 조립품의 이름표다.
그러니 성분표를 다시 보면, 거기 적힌 것은 외계어가 아니다. 백 가지 남짓의 블록 가운데 몇 개를 골라 조립한 물건들의 목록이다. 글리세린의 이름 안에 있는 산소 셋 가운데 하나는 “~올”이라는 꼬리표를 단 특별한 묶음인데, 이 꼬리표가 성분명 곳곳에 왜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지는 뒤에서 밝혀진다. 정제수가 어째서 거의 모든 성분표의 맨 앞을 차지하는지 H₂O라는 작은 분자의 사연도 머지않아 풀린다.
다음 강에서는 블록과 블록이 붙는 방식을 들여다본다. 왜 어떤 블록은 물에만 녹고, 또 어떤 블록은 기름에만 녹을까? 그 차이는 결합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