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도 천천히 녹슨다
깎아둔 사과를 책상에 두면 단면이 갈색으로 변한다. 비를 맞은 못은 붉게 녹슨다. 그리고 8강에서 본 것 — 오래 둔 기름이 찌드는 산패. 겉모습은 제각각이지만, 이 셋은 화학자의 눈으로 보면 한 가족이다. 모두 산화다. 무언가가 산소에게 전자를 빼앗기면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지금 피부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노화’라고 부르는 것의 큰 부분은, 사실 이 느린 녹슴이다. 화장품이 그토록 ‘항산화’를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화를 세월이라는 막연한 운명에서 떼어내, 막거나 늦출 수 있는 화학 반응으로 다시 정의하는 일—이번 강의 주제다.
범인은 전자 한 짝이 빈 외톨이
섹션 제목: “범인은 전자 한 짝이 빈 외톨이”산화를 일으키는 주범부터 보자. 활성산소(자유라디칼)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정체는 단순하다. 전자가 짝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 남은 분자다.
분자 속 전자는 보통 둘씩 짝지어 다닐 때 안정하다. 그런데 짝을 잃고 홀로 남은 전자가 생기면, 그 분자는 안절부절못한다. 안정을 되찾으려고 옆 분자에게서 전자를 빼앗는다. 문제는 빼앗긴 쪽이다. 전자를 잃은 그 분자가 이번엔 외톨이가 되어, 또 옆을 턴다. 도미노처럼 강탈이 번져 나간다. 화학에서는 이것을 연쇄반응이라 부른다.
이 도미노가 가장 잘 번지는 곳이 세포막이다. 세포막은 기름(지질)으로 된 막인데, 라디칼이 그 지질에서 전자를 빼앗기 시작하면 산화가 막을 따라 줄줄이 퍼진다. 이것을 지질 과산화라 한다. 막이 손상되고, 단백질도 DNA도 같은 식으로 공격받는다. 8강에서 기름이 찌드는 산패가 바로 이 지질의 라디칼 산화였다. 그때 병에 든 기름에서 일어나던 일이, 지금은 우리 세포막에서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오해 하나를 짚자. 활성산소가 무조건 악당은 아니다. 우리 몸은 면역 방어나 세포 신호에도 활성산소를 일부러 쓴다. 문제는 양이다. 생성량이 처리 능력을 넘어설 때—그 과잉 상태가 손상을 만든다. ‘활성산소를 완전히 없앤다’는 광고 문구는 그래서 화학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다 없애는 것 자체가 정상이 아니다.
라디칼 연쇄 — 외톨이 전자를 가진 분자가 옆 분자에서 전자를 빼앗고(화살표), 빼앗긴 분자가 또 외톨이가 되어 다음을 공격하는 도미노. 세포막 지질을 따라 번지는 모습.
한 가지 단서를 달아두자. 앞서 사과와 못과 산패를 한 가족이라 묶었지만, 엄밀히는 사정이 조금씩 다르다. 사과 갈변은 효소가 매개하는 산화이고, 못의 녹은 전기화학적 산화다. 세포막에서 벌어지는 라디칼 연쇄와는 세부 경로가 같지 않다. 다만 ‘산소가 전자를 빼앗아 무언가를 망가뜨린다’는 큰 줄기에서는 분명한 한 가족이다. 비유는 거기까지다.
노화는 정말 운명인가
섹션 제목: “노화는 정말 운명인가”그렇다면 노화는 그저 흐르는 세월이라 막을 도리가 없는 걸까.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간단한 비교가 답을 준다. 평생 옷에 가려져 햇빛을 거의 못 본 피부와, 매일 햇볕에 드러나는 손등을 나란히 놓아 보면 차이가 분명하다. 손등이 훨씬 더 늙어 있다. 나이는 똑같은데 말이다. 그 차이를 만든 것이 햇빛, 정확히는 자외선이다.
피부과학은 노화를 두 갈래로 나눈다. 세월에 따라 안에서 진행되는 자연노화, 그리고 자외선 같은 바깥 요인이 부추기는 광노화다. 광노화의 경로는 꽤 잘 밝혀져 있다. 자외선이 피부에 닿으면 활성산소가 폭증한다. 늘어난 활성산소는 세포 안의 스위치(AP-1이라는 전사인자)를 켜고, 그 스위치는 콜라겐을 끊는 가위 같은 효소—기질금속단백분해효소, 줄여서 MMP—를 만들어낸다. 이 가위가 진피의 콜라겐을 잘라내고, 새 콜라겐이 차오르는 것도 막는다. 탄력이 빠지고 주름이 잡히는 결과다.
평소 우리 몸이 이 활성산소를 가만히 두는 건 아니다. 18강에서 본 효소들이 1차 방어선으로 일한다. 활성산소를 붙잡아 덜 위험한 물질로 바꾸는 효소들이 늘 일하고 있다. 그러나 자외선이나 대기오염, 흡연으로 공격이 방어를 넘어서면 균형이 무너진다. 이 적자 상태가 산화 스트레스다.
반전은 여기 있다. 광노화는 외부 요인이 주범이라는 것—그래서 적어도 그 부분은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노화의 큰 몫이 ‘어쩔 수 없는 세월’이 아니라 ‘햇빛이 만든 산화’라면, 가린 만큼 늦출 수 있다.
대신 산화당해 주는 방패
섹션 제목: “대신 산화당해 주는 방패”그럼 무엇으로 막는가. 한 축은 자외선을 가리는 일이고(13강에서 다룬 자외선 차단제), 다른 한 축이 이번 강의 주인공인 항산화제다.
항산화제는 일종의 방패다. 라디칼이 세포의 지질이나 단백질을 털기 전에, 항산화제가 먼저 자기 전자를 순순히 내준다. “나를 대신 산화시켜라” 하고 라디칼을 달래는 것이다. 자기는 산화되지만, 항산화제가 산화돼서 된 라디칼은 한결 얌전해서 다음 도미노로 이어지지 않는다. 연쇄가 거기서 끊긴다. 자기가 대신 녹슬어 주는 방패인 셈이다.
대표 선수가 비타민C와 비타민E다. 둘은 담당 구역이 다르다. 비타민C는 물에 녹아 세포 안팎의 물 영역을 맡고, 비타민E는 기름에 녹아 세포막과 지질 영역을 지킨다. 흥미로운 건 둘의 협력이다. 비타민E가 막에서 라디칼을 막다가 자기 전자를 다 써버리면, 물 쪽에 있던 비타민C가 와서 소모된 비타민E를 도로 충전해준다. 산화된 E를 C가 되살려 다시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 2인 1조로 한쪽이 탄약을 쓰면 다른 쪽이 재장전해 주는 구조다. 그래서 둘을 함께 쓰면 따로 쓸 때보다 서로를 오래 버티게 한다.
2인 1조 — 세포막(기름 영역)에서 비타민E가 라디칼을 막다 소모되면, 물 영역의 비타민C가 비타민E를 재생시키는 순환 화살표.
그래서 화장품에서는
섹션 제목: “그래서 화장품에서는”이 협력을 화장품에 그대로 옮긴 사례가 비타민C와 비타민E를 함께 넣은 세럼이다. 여기에 페룰산이라는 성분을 더하면 효과가 한 단계 더 올라간다고 본다. 한 연구에 따르면, 비타민C와 비타민E 용액에 페룰산을 넣었더니 두 비타민이 더 안정해졌고,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지키는 정도가 대략 두 배로 뛰었다. 페룰산이 비타민들의 탄약을 안정시키는 안정제 역할을 한 셈이다. 다만 이 연구는 해당 배합을 만든 제조사 계열의 것이고 일부 결과는 사람이 아닌 실험 조건에서 나온 만큼, “이 조합은 무조건 두 배”라고 일반화할 일은 아니다.
비타민C 세럼을 써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었을 일도 이 화학으로 설명된다. 맑던 세럼이 어느 날 주황빛이나 갈색으로 변한 경우다. 그건 변질이 아니라, 항산화제가 제 일을 한 흔적이다. 순수 비타민C(L-아스코르브산)는 물·빛·열·금속에 약해서, 라디칼을 만나기도 전에 공기 중 산소에 먼저 산화되곤 한다. 갈변은 그 산화가 진행됐다는—즉 효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비타민C 제품은 불투명한 용기에 담고, 산성으로(대략 pH 2.5~3.5) 맞추고, 비타민E나 페룰산 같은 짝꿍을 붙여 버티게 만든다. 비타민C의 정확한 농도와 안정성 문제는 23강에서 따로 깊이 들여다본다.
마지막으로 가장 흔한 기대 하나를 정리하자. ‘항산화 세럼 하나면 노화 끝’이라는 기대다. 그렇지 않다. 항산화제는 자외선 차단의 보조이지 대체가 아니다. 광노화의 출발점이 자외선인 이상, 가장 확실한 수는 여전히 자외선을 가리는 것이고, 항산화제는 빠져나온 활성산소를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이다. 게다가 ‘항산화’를 내세우는 성분이라고 모두 같은 수준으로 검증된 것도 아니다. 비타민C와 비타민E처럼 근거가 비교적 탄탄한 것도 있지만, 효능 근거가 아직 얇은 후보 성분도 많다.
4부를 닫으며
섹션 제목: “4부를 닫으며”여기까지가 우리 몸과 피부를 분자 수준에서 들여다본 4부의 마지막이다. 단백질과 효소를 거쳐, 피부가 왜, 어떻게 녹스는지까지 왔다.
피부가 분자 수준에서 늙는 까닭을 봤으니, 다음 순서는 자연스럽다. 그걸 막겠다고 통에 담아 파는 ‘활성성분’들—비타민C, 레티놀, 나이아신아마이드 같은—이 정말 광고만큼 일하는지 따져볼 차례다. 농도는 얼마여야 하는지, 안정성은 어떤지, 근거는 어디까지인지. 23강에서 그 활성성분들을 본격적으로 해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