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외선 차단의 화학
선크림 코너에 서면 어느 순간 두 진영으로 나뉜 듯한 말을 듣게 된다. 한쪽은 “물리 선크림은 빛을 거울처럼 튕겨내니까 피부에 안 흡수돼 안전하다”고 하고, 다른 쪽은 “화학 선크림은 피부 속에서 자외선을 흡수해 처리하니 발림성이 좋다”고 한다. 무기자차냐 유기자차냐, 물리냐 화학이냐—이 구분은 어느새 안전과 위험을 가르는 선처럼 통한다.
그런데 이 깔끔한 대립에는 사실 빈틈이 있다. “물리=반사, 화학=흡수”라는 도식 자체가 절반만 맞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무기 차단제, 그러니까 거울처럼 빛을 튕겨낸다고 알려진 그 흰 가루도 실은 빛의 대부분을 흡수해서 막는다. 12강에서 흰 가루로 잠깐 등장했던 산화아연과 이산화티탄—이번 강의는 그 가루가 선크림 통에 들어가 햇빛을 어떻게 막는지, 그리고 왜 “어느 쪽이 무조건 좋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지에 관한 것이다.
자외선은 한 종류가 아니다 — UVB와 UVA, 그리고 SPF·PA
섹션 제목: “자외선은 한 종류가 아니다 — UVB와 UVA, 그리고 SPF·PA”막는 법을 따지기 전에 무엇을 막는지부터 정리하자. 피부에 닿는 자외선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둘은 파장이 다르고, 피부에 남기는 흔적도 다르다.
짧은 쪽이 UVB다. 파장이 290320나노미터(nm)로 짧고 에너지가 높아, 피부 표면을 태운다. 한여름 해변에서 어깨가 빨갛게 익는 화상, 그게 주로 UVB의 작품이다. 긴 쪽은 UVA다. 320400nm로 파장이 길어 피부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 당장 빨개지지는 않아도 시간을 두고 피부를 늙힌다. 색소침착과 광노화—주름과 잡티의 배후에 UVA가 있다. 외우기 쉽게 갈라 두면, B는 태우고(Burning) A는 늙힌다(Aging)고 기억하면 된다. 흐린 날이나 창문 너머로도 들어오는 쪽은 주로 UVA다.
자외선이 둘로 나뉘니, 막는 정도를 재는 지표도 둘이다. 하나는 익숙한 SPF. 선크림을 바른 피부가 안 바른 피부보다 홍반, 곧 빨개짐을 몇 배나 더 버티는지를 나타낸 비율이다. 화상의 주범이 UVB이므로 SPF는 사실상 UVB를 얼마나 막는지를 보는 숫자다. 다른 하나가 PA다. 이쪽은 UVA를 막는 등급으로, 자외선을 쬔 뒤 피부가 얼마나 검어지는지를 기준으로 매긴다. 한국과 일본에서 주로 쓰는 표기이고, +가 많이 붙을수록 UVA를 더 막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 SPF 숫자가 두 배면 차단력도 두 배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 자료에 따르면 SPF15가 UVB의 약 93%, SPF30이 약 97%, SPF50이 약 98%를 막는다. 숫자는 두세 배로 뛰지만 차단율의 차이는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50이 15보다 무한정 안전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이 수치는 정해진 양을 충분히 발랐을 때의 이야기다. 실제로는 대부분 그보다 얇게 바르고, 땀과 마찰로 지워지므로, 높은 숫자 하나보다 자주 덧바르는 쪽이 실속 있다. 참고로 한국은 자외선차단제를 기능성화장품으로 따로 관리해, 식약처가 허가한 성분만 정해진 한도 안에서 쓰도록 하고 있다.
파장축(290~400nm) 위의 UVB·UVA 구간 — UVB는 화상·표피, UVA는 광노화·진피까지 침투. SPF는 UVB 지표, PA는 UVA 지표
무기 차단제 — 거울이라더니, 사실은 검은 옷에 가깝다
섹션 제목: “무기 차단제 — 거울이라더니, 사실은 검은 옷에 가깝다”이제 본론이다. 무기 차단제의 주인공은 12강에서 만난 그 두 가루, 산화아연과 이산화티탄이다. 흔히 ‘물리 차단제’라 부르는데, 이 이름이 오해의 출발점이다.
통념은 이렇다. 피부 위에 얹힌 흰 가루가 작은 거울처럼 자외선을 튕겨내 막는다는 것. 빛을 반사하니 피부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래서 안전하다는 그림이다. 직관적이고 깔끔하다. 다만 실측과는 어긋난다.
한 연구에서 산화아연과 이산화티탄이 자외선을 다루는 방식을 측정했더니, 거울처럼 반사하거나 흩어 버리는 양은 자외선 전 영역에서 평균 약 4~5%에 불과했다. 이 정도 반사만으로는 SPF 2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95% 안팎의 차단은 어디서 오는가. 답은 흡수다. 이 가루들은 빛을 받아들여 그 에너지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자외선을 막는다. 거울에 비유했지만, 실제로는 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옷에 더 가까운 셈이다. ‘물리’라는 이름이 우리를 거울 쪽으로 오해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왜 흰 가루가 빛을 흡수할까. 산화아연과 이산화티탄은 반도체의 성질을 가진 물질이라, 특정 에너지 이상의 빛—자외선이 여기에 해당한다—을 받으면 그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 자세한 원리는 입자의 전자 구조에 달려 있어 여기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핵심만 남기면, 무기 차단제도 흡수가 주된 무기이고 반사·산란은 거들 뿐이라는 것이다.
‘거울’(반사·산란 약 4~5%, SPF 2 미만)과 ‘검은 옷’(흡수 약 95%)의 대비 — 무기 차단제는 실제로 오른쪽에 가깝다
그럼 백탁은 왜 생기나. 입자가 크면 자외선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까지 흩어 버려 피부가 하얗게 뜬다. 그러니 백탁은 자외선을 잘 막는다는 증거가 아니라, 가시광선이 산란된 결과일 뿐이다. 백탁이 곧 차단력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유기 차단제 — 빛을 받아 떨어내는 작은 안테나
섹션 제목: “유기 차단제 — 빛을 받아 떨어내는 작은 안테나”다른 한쪽, 유기 차단제는 옥시벤존·아보벤존·옥토크릴렌 같은 유기 화합물들이다. ‘화학 차단제’라 불리며, 이쪽이야말로 빛을 흡수한다는 설명이 붙는다. 그건 맞다. 다만 그 흡수가 피부와 반응하는 위험한 화학반응이라는 인상은 사실과 다르다.
작은 안테나를 떠올리면 쉽다. 이 분자들은 빛을 잘 받아들이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자외선이 날아오면 분자 속 전자가 그 에너지를 받아 잠깐 들뜬다. 그러고는 받은 에너지를 미미한 열로 살짝 떨어 흩어 버리고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다시 빛을 받을 준비가 끝나는 것이다. 받고, 떨어내고, 다시 받고. 피부 속에서 무언가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빛 에너지를 열로 바꿔 흘려보내는 일이다.
문제는 이 순환이 늘 매끄럽지는 않다는 데 있다. 어떤 분자는 빛을 몇 번 받다가 부서진다. 대표적인 게 UVA를 막는 아보벤존이다. 들뜬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분해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차단력이 떨어진다. 한 측정에서는 햇빛에 한 시간쯤 두자 빛을 흡수하는 능력이 약 36% 줄었다. 그래서 제조사는 옥토크릴렌 같은 성분을 함께 넣어 아보벤존이 부서지기 전에 곁에서 에너지를 받아 가라앉혀 준다. 일종의 보디가드인 셈인데, 이 광안정화 과정은 그 자체로 한 챕터가 될 만큼 복잡하니 여기서는 이름만 걸어 둔다.
유기 차단제 한 가지는 대개 특정 파장대만 흡수한다. 그래서 UVB용과 UVA용을 섞고, 거기에 안정화 성분까지 더해 여러 필터를 조합한다. 선크림 성분표가 길어지는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다.
그래서 화장품에서는? — 트레이드오프, 그리고 옥시벤존 이야기
섹션 제목: “그래서 화장품에서는? — 트레이드오프, 그리고 옥시벤존 이야기”여기까지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무기든 유기든 양쪽 다 빛을 흡수해서 막는다. 차단의 핵심 원리는 같다. 그렇다면 둘을 가르는 건 무엇인가. 메커니즘이 아니라 쓰는 감각과 치르는 대가다.
무기 차단제는 빛을 잘 흩는 흰 가루다 보니 백탁이 지기 쉽고 발림이 뻑뻑하다. 대신 자극이 적은 편이라 민감한 피부나 아기용으로 자주 권해진다. 유기 차단제는 투명한 액체라 백탁이 없고 발림성이 좋아 매일 쓰기에, 또 메이크업 아래 깔기에 좋다. 대신 아보벤존처럼 빛에 부서지는 문제나 자극 가능성을 안고 간다. 어느 쪽도 공짜가 아니다. 한쪽의 장점은 다른 쪽의 단점과 맞물려 있는 트레이드오프이지, “물리가 안전하고 화학이 위험하다”는 식의 우열 관계가 아니다.
이 우열 프레임을 가장 많이 떠받치는 게 옥시벤존 논란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FDA가 사용 조건을 최대로 잡은 임상에서, 옥시벤존을 비롯한 몇몇 유기 필터가 피부를 통해 혈액에서 검출되는 수준까지 전신에 흡수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검출량은 FDA가 추가 시험을 요구하는 기준치를 넘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것이 “위험이 입증됐다”는 뜻이 아니라 “더 알아봐야 한다”는 신호라는 점이다. 흡수가 곧 해로움은 아니다. FDA가 산화아연·이산화티탄은 안전·유효로 인정하고 일부 유기 필터는 보류한 것도, 위험을 확인해서가 아니라 안전을 확인할 데이터가 아직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에 자주 엮이는 게 하와이의 판매 금지다. 하와이가 옥시벤존이 든 제품을 막은 건 사람의 건강 때문이 아니라 산호초를 지키기 위해서다. 산호 백화라는 환경 문제와 인체 안전성은 별개의 사안인데, 뉴스에서 나란히 다뤄지다 보니 하나로 묶여 “사람한테도 위험하니 금지했다”는 오해로 번지곤 한다. 두 문제는 따로 떼어 봐야 한다.
다음 강 예고
섹션 제목: “다음 강 예고”12강에서 흰 가루로 던져 두었던 산화아연과 이산화티탄은, 이렇게 자외선을 흡수해 막는 무기 차단제로 본격 등장했다. 거울이라기보다 검은 옷에 가까운 가루였던 셈이다.
그런데 글 곳곳에 작은 그림자가 남았다. 아보벤존이 빛에 부서질 때, 또 무기 차단제가 빛을 받아 처리하는 과정에서, 활성산소라 부르는 불안정한 물질이 생길 수 있다는 대목이다. 빛을 막는 일에도 부산물이 따르는 것이다. 이 활성산소가 무엇이고 피부에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것을 다스리는 항산화제 이야기는 뒤에서 따로 풀어낼 자리가 있다. 백탁을 줄이려 무기 가루를 더 잘게 쪼개고 표면을 감싸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빛을 막는 화학을 봤으니, 이제 그 너머의 화학으로 넘어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