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랄과 색조 — 색은 어디서 오나
파운데이션을 손등에 펴 바르면 살색이 입혀진다. 아이섀도를 톡톡 두드리면 눈두덩에 황금빛이 깔린다. 이 색은 어디서 오는 걸까. 물감처럼 색물이 묻어나는 거라고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화장품의 색은 대부분 녹는 색물이 아니라, 물에도 기름에도 녹지 않는 광물 가루에서 나온다. 쉽게 말해 곱게 빻은 돌가루다.
더 이상한 경우도 있다. 펄 아이섀도의 무지갯빛 반짝임에는 색소라 할 만한 것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각도를 틀면 색이 어른거린다. 색이 없는데 색이 보이는 것이다. 비눗방울 표면에 비치는 무지개를 떠올리면 된다. 비눗방울에 물감을 칠한 사람은 없다. 그 색은 얇은 막이 빛을 다룬 결과일 뿐이다. 펄도 똑같다.
색이 나는 두 가지 길 — 녹느냐, 흩뿌려지느냐
섹션 제목: “색이 나는 두 가지 길 — 녹느냐, 흩뿌려지느냐”색을 내는 물질은 크게 둘로 나뉜다. 녹는 것과 안 녹는 것이다.
설탕을 커피에 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단맛만 남듯, 어떤 착색제는 액체에 분자 단위로 완전히 녹아 섞인다. 이런 것을 염료(dye)라 부른다. 반대로 색깔 모래를 물에 뿌리면 알갱이가 녹지 않고 물속에 흩뿌려진 채 색을 띤다. 이렇게 녹지 않고 고체 알갱이로 분산돼 색을 내는 것이 안료(pigment)다. 입자 크기로 비유하면, 염료 알갱이가 핀 머리만 하다면 안료 알갱이는 축구공만 하다. 그만큼 크고 단단한 덩어리다.
왜 색이 보이는가도 둘이 조금 다르다. 염료는 분자가 특정 색의 빛만 골라 흡수하고, 흡수되지 않고 남은 빛이 그 색으로 보인다. 안료도 이 흡수를 하지만, 거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알갱이가 빛을 튕겨 내고 흩뜨리는 산란이다. 입자의 크기와 모양, 굴절률에 따라 빛이 사방으로 반사되면서 색과 불투명함이 생긴다. 색이 분자의 화학만이 아니라 알갱이의 물리에서도 나온다는 뜻이다.
이 차이는 사용감으로 이어진다. 안료는 빛에 강해 잘 바래지 않고,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씻어 내지 않고 오래 두는 파운데이션·아이섀도·립에는 주로 안료가 쓰인다. 반대로 잘 지워지는 게 오히려 미덕인 샴푸 같은 제품에는 염료가 흔하다. 색조 메이크업의 색이 대부분 녹은 색물이 아니라 분산된 광물 가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염료(컵 속 설탕물처럼 녹음)와 안료(물에 뿌린 모래처럼 흩뿌려짐)의 차이
살색은 산화철, 흰빛은 이산화티탄, 반짝임은 마이카
섹션 제목: “살색은 산화철, 흰빛은 이산화티탄, 반짝임은 마이카”그러면 그 광물 가루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지난 12강에서 무기 광물로 잠깐 스쳐 지나간 마이카·산화철·이산화티탄이, 이번엔 색의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한다.
살색과 갈색 톤의 중심은 산화철이다. 철이 녹슬면 불그스름해지는 그 산화철이 맞다. 산화철에는 세 가지 형제가 있다. 헤마타이트라 불리는 빨강(Fe₂O₃), 노랑(FeOOH), 마그네타이트라 불리는 검정(Fe₃O₄)이다. 이 셋을 비율을 달리해 섞으면 거의 모든 살색과 갈색을 만들 수 있다. 파운데이션 한 통의 살색은 이 세 가루의 배합인 셈이다.
흰빛과 가리는 힘은 이산화티탄(TiO₂)이 맡는다. 이산화티탄은 굴절률이 매우 높은 흰 가루다. 굴절률이 높다는 건 빛을 그만큼 세게 꺾고 튕겨 낸다는 뜻이고, 그래서 빛을 강하게 산란시켜 바탕을 뿌옇게 가린다. 흰 페인트가 벽의 얼룩을 덮고 젖빛 유리 너머가 안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파운데이션의 커버력은 상당 부분 이 가루에서 나온다.
반짝임, 곧 펄은 마이카가 만든다. 다만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바로잡아야 한다. 마이카 자체는 색이 없는 투명한 박편일 뿐이다. 색을 내는 건 마이카가 아니라 그 위에 입힌 얇은 코팅이다. 마이카 박편에 이산화티탄을 얇게 입히면, 굴절률이 크게 다른 두 층의 경계에서 빛이 반사되며 서로 간섭한다. 그 결과 특정 색의 빛만 보강돼 반사되고, 코팅의 두께에 따라 보이는 색이 달라진다. 앞서 말한 비눗방울 무지개와 똑같은 박막 간섭이다. 그래서 펄은 색소가 거의 없이도 무지갯빛을 낸다. 색이 없는데 색이 보인다는 말의 정체가 이것이다.
파랑과 보라 쪽에는 울트라마린이 있다. 청금석이라는 보석에서 얻던 그 군청색을, 지금은 고령토와 황 같은 원료를 높은 온도로 구워 만든다.
산화철 3색 — Fe₂O₃ 빨강 / FeOOH 노랑 / Fe₃O₄ 검정
마이카 박편에 입힌 이산화티탄 코팅 — 코팅 두께에 따라 반사색이 바뀌는 박막 간섭
그렇다면 화장품 성분표 맨 끝에 작게 적힌 ‘CI 77491’ 같은 숫자는 무엇일까. 0강에서 색소는 함량과 무관하게 목록 맨 끝에 따로 모인다고 했는데, 거기 붙는 그 번호다. CI는 컬러 인덱스(Colour Index)의 약자로, 색을 내는 물질을 화학 구조에 따라 분류해 매긴 국제 식별 번호다. 77000번대는 무기 광물 안료를 가리킨다. 산화철 빨강이 77491, 노랑이 77492, 검정이 77499, 이산화티탄이 77891, 울트라마린이 77007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CI 번호는 어디까지나 화학 분류 코드일 뿐, 안전을 보증하는 승인 도장이 아니다. 번호가 붙었다고 안전이 검증됐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색소를 실제로 규제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은 CI 번호가 아니라 산화철·이산화티탄 같은 일반명으로 관리하고, 한국은 식약처가 색소의 종류와 기준을 정한 고시로 따로 관리한다. 그리고 같은 광물이라도 쓸 수 있는 부위가 다르다. 어떤 색소는 눈가에는 되지만 입술에는 안 되는 식으로, 부위별 규제가 갈린다. 색소 칸에 같은 번호가 있다고 해서 어디에나 똑같이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미네랄 화장품”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섹션 제목: “”미네랄 화장품”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이쯤에서 ‘미네랄 화장품’이라는 말을 짚어 볼 만하다. 광물로 만들었다는 인상을 주고, 흔히 천연·순수 같은 단어와 함께 묶인다. 그런데 사실 미네랄 메이크업은 규제상 표준 정의가 없는 마케팅 용어다. 무엇을 얼마나 넣어야 미네랄이라 부를 수 있는지 정해 둔 법적 기준이 없다.
그러다 보니 경계가 느슨하다. 이산화티탄과 산화아연만 들어가도 미네랄이라 부르는 게 틀린 말은 아닌데, 이 둘은 수십 년 전부터 평범한 파운데이션과 파우더에 쓰여 온 성분이다. 미네랄 메이크업에 흔히 들어가는 마이카·이산화티탄·산화아연·울트라마린은, 따지고 보면 앞에서 본 그 평범한 광물 안료들이다. 다시 말해 미네랄 화장품이 따로 있다기보다, 늘 쓰던 광물 안료에 천연이라는 이름표가 더 붙은 쪽에 가깝다.
천연·순수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로 규제된 단어가 아니라 자유롭게 쓸 수 있다. 게다가 미네랄로 팔리는 성분이 다 자연에서 캔 광물인 것도 아니다. 펄감을 내는 비스무트옥시클로라이드는 미네랄로 분류되곤 하지만, 화장품용은 사실상 공정으로 만든 합성품이다. 그러니 ‘미네랄’이라는 글자 하나로 천연이라거나 더 안전하다고 단정할 근거는 약하다.
다음 강 예고
섹션 제목: “다음 강 예고”색을 다뤘으니, 다음은 향이다. 코로 맡는 그 향은 또 어떤 분자가 만들고, 향료는 왜 성분표에서 ‘향료’ 한 단어로 뭉뚱그려 적히는지—색소와는 또 다른 사정이 거기 있다. 같은 광물이 강마다 다른 얼굴로 나온 것처럼, 익숙한 성분 하나가 새 맥락에서 다시 보이는 일은 앞으로도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