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이으면 다른 것이 된다 — 고분자와 실리콘
1강에서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물질은 분자로 되어 있고, 그 분자는 더 이어질 수 있다는 것. 그때는 짧은 분자 몇 개를 잇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아주 길게 이으면 어떻게 될까. 답은 의외로 극적이다. 날아다니던 기체가 손에 잡히는 비닐봉지가 되고, 흐르던 물이 떠지는 젤이 된다. 부품은 똑같다. 길이만 달라졌을 뿐인데, 전혀 다른 물질처럼 행동한다.
이 ‘길이의 마법’이 11강의 전부다. 화장품의 발림성, 끈적이지 않는 점도, 피부 위에 남는 얇은 막, 수분을 붙잡는 보습—겉보기에 따로인 이 성질들이 사실 한 가지 원리에서 나온다. 작은 분자를 길게 이으면 성질이 통째로 바뀐다는 원리다.
클립 한 개와 클립 사슬
섹션 제목: “클립 한 개와 클립 사슬”비유부터 들자. 책상 위 클립 한 개를 떠올려 보자. 가볍고, 입김에도 날아간다. 그 클립 수천 개를 고리에 고리를 걸어 길게 엮으면, 같은 부품인데도 묵직한 사슬이 되어 전혀 다르게 군다. 늘어지고, 얽히고,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부품의 종류가 바뀐 게 아니다. 개수와 길이가 바뀌었을 뿐이다.
화학에서 이 클립 한 개에 해당하는 작은 반복 단위를 단량체라 부른다. 단량체가 수백, 수천 개 이어진 긴 사슬 분자가 고분자(polymer)다. 단량체를 이어 고분자로 만드는 반응은 중합(polymerization)이라 하고, 한 사슬에 단위가 몇 개나 들어 있는지를 중합도라 한다. 말은 어렵지만 뜻은 단순하다. 중합도란 곧 사슬의 길이다.
길이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사슬이 길어지면 사슬끼리 서로 얽히기 때문이다. 짧은 분자는 매끄럽게 미끄러져 흐르지만, 긴 사슬은 국수 가락처럼 서로 엉겨 점도가 오르고 단단해지고 잘 녹지 않게 된다. 같은 단위로 만들어도 길이에 따라 묽은 액체가 되기도, 끈끈한 젤이 되기도, 딱딱한 고체가 되기도 한다.
가장 깔끔한 예가 에틸렌과 폴리에틸렌이다. 에틸렌은 상온에서 날아다니는 기체다. 그 에틸렌 단위를 길게 이으면 폴리에틸렌, 곧 비닐봉지와 페트병의 재료인 고체가 된다. 단위는 똑같다. 짧으면 기체, 길면 손에 잡히는 고체. 길이 하나로 물질의 상태가 통째로 건너뛴다.
단량체 한 개가 중합으로 긴 사슬 고분자가 되고, 에틸렌(기체)이 폴리에틸렌(고체)으로 도약한다. (이미지: OpenStax, CC BY 4.0)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짚어 두자. ‘고분자’라고 하면 합성 플라스틱, 곧 나쁜 화학물질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고분자는 합성의 동의어가 아니다. 뒤에 나올 히알루론산도, 잔탄검도, 우리 몸을 이루는 단백질도 모두 거대한 고분자다. 천연이냐 합성이냐가 아니라 무엇으로 어떻게 이어졌느냐가 그 물질의 성질을 정한다.
탄소가 아닌 사슬, 실리콘
섹션 제목: “탄소가 아닌 사슬, 실리콘”지금까지 사슬은 모두 탄소로 만들었다. 6강에서 본 대로, 유기화합물의 골격은 탄소가 줄지어 이룬다. 그런데 사슬을 만드는 원소가 탄소만은 아니다. 실리콘이 그 예다.
실리콘은 탄소가 아니라 규소와 산소가 번갈아 이어진 사슬(Si-O)에 작은 메틸기가 곁가지로 붙은 고분자다. 화장품 성분표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것이 다이메티콘이다. 다이메티콘은 이 규소-산소 사슬이 길게 이어진 선형 고분자이고, 앞서 말한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사슬이 짧으면 묽은 기름처럼 흐르고, 길수록 점성이 높아진다. 점도를 사슬 길이로 설계하는 셈이다.
실리콘이 화장품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발림성이다. 표면장력이 낮아 피부 위에서 매끄럽게 퍼지고, 특유의 보송하고 실키한 감촉을 남긴다. 또 하나는 막이다. 긴 사슬이 피부나 모발 위에 얇은 필름을 만들어 윤기를 주고 수분이 날아가는 것을 늦춘다. 다이메티콘이 보습제와 헤어 컨디셔너, 메이크업 프라이머에 두루 쓰이는 까닭이다. 사이클로메티콘이라는 친척도 있는데, 이쪽은 고리 모양의 작고 휘발성 강한 분자다. 다른 성분을 매끈하게 펴 바른 뒤 슬그머니 증발해 사라지는 심부름꾼 역할을 한다.
다이메티콘은 랩처럼 밀봉하는 막이 아니라, 기체와 땀이 통과하는 그물 같은 ‘숨 쉬는 막’을 만든다.
이쯤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걱정 하나를 짚는다. 실리콘이 모공을 막는다는 이야기다. ‘실리콘 프리’를 내세운 제품이 흔할 만큼 널리 퍼진 불안이지만, 이 주장의 근거는 생각보다 약하다. 다이메티콘은 여러 평가에서 모공을 막는 정도가 거의 없는 쪽(코메도제닉 척도 0~1)으로 일관되게 나온다. 분자가 커서 모공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에 머무는 데다, 그 막은 랩처럼 빈틈없이 덮는 밀봉이 아니라 숨구멍이 뚫린 그물에 가깝다. 수분 증발은 늦추면서도 산소와 땀은 통과시킨다.
유해성 논란도 정리해 둘 만하다. 유럽연합이 일부 실리콘을 규제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대상은 사이클로메티콘 계열의 고리형 휘발성 실리콘(D4·D5·D6)이고, 규제 사유는 피부에 해롭다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오래 남고 쌓이는 성질 때문이다. 환경 규제를 피부 위험으로 옮겨 읽으면 곤란하다. 선형 다이메티콘은 이 고리형 종과 구조가 다르다는 점도 덧붙여 둔다.
물을 다루는 사슬
섹션 제목: “물을 다루는 사슬”고분자는 점도와 막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물을 붙잡고 가두는 도구로도 쓰인다. 여기서 이 강의의 작은 반전이 나온다. 보습의 대명사로 불리는 히알루론산이 사실은 거대한 고분자라는 것이다.
히알루론산은 당 분자가 길게 이어진 다당류 사슬이다. 그것도 우리 몸이 직접 만들어 피부에 품고 있는 분자다. 사슬을 따라 물을 끌어안기 때문에 보습에 쓰인다. 그런데 광고가 즐겨 쓰는 표현 하나는 걸러 들어야 한다. 히알루론산이 자기 무게의 1000배 물을 머금는다는 말이다. 이 숫자는 실험으로 입증된 적이 없다. 실제 측정값은 분자량과 조건에 따라 수십 배 수준이다. 충분히 인상적인 능력인데, 굳이 1000배라는 검증되지 않은 숫자를 붙일 이유는 없었던 셈이다.
크기도 중요하다. 히알루론산은 분자량에 따라 하는 일이 갈린다. 큰 것은 피부 표면에 막을 만들어 수분이 날아가는 것을 막고, 작은 것은 안쪽으로 더 스며든다. 그래서 ‘저분자가 무조건 좋다’는 말도 단순화다. 작을수록 잘 스미지만 보습이 오래가지 않는 맞교환이 있고, 그래서 여러 크기를 섞어 표면과 안쪽을 함께 노리는 처방이 많다.
물을 가두는 또 다른 사슬은 카보머다. 카보머는 산성 상태에서 돌돌 말린 실타래처럼 웅크리고 있다. 그런데 염기로 중화하면 사슬을 따라 같은 부호의 전하가 생기고, 같은 전하끼리 서로 밀어내며 사슬이 활짝 펴진다. 웅크렸던 실타래가 펴지면서 그 사이에 물을 가둬 부피가 약 1000배까지 부풀고, 묽은 액체가 투명한 젤로 변한다. 물을 먹으면 펴지는 용수철 뭉치를 떠올리면 된다. 토너가 에센스로, 에센스가 젤로 되직해지는 텍스처가 이렇게 만들어진다.
잔탄검도 자주 보인다.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다당류 사슬인데, 재미있는 성질이 있다. 가만히 두면 되직하고 흔들거나 펌핑하면 묽어진다. 통 안에서는 흘러내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다가, 짜내는 힘이 가해지면 부드럽게 나오는 텍스처가 여기서 온다.
유기물 편을 닫으며
섹션 제목: “유기물 편을 닫으며”작은 분자 하나가 길게 이어지면 성질이 통째로 도약한다. 11강에서 본 것은 이 한 문장이다. 기체가 고체가 되고, 묽은 물이 젤이 되고, 당 사슬이 물을 끌어안는다. 발림성도 점도도 보습막도, 화장품을 만드는 사람이 사슬의 길이와 모양으로 설계하는 결과물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는 뒤에서 다시 만난다. 히알루론산이 우리 몸이 만드는 당 사슬이라는 사실은 16강에서 생체분자를 다룰 때 이어 간다. 그 거대한 분자가 몸속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거기 있다. 카보머와 잔탄검 같은 점증제는 21강에서 보습과 제형의 텍스처를 이야기할 때 다시 등장한다. 점도를 어떻게 디자인하는지, 보습막은 어떻게 짜는지가 그쪽 몫이다.
그리고 한 가지가 끝나고 다른 하나가 열린다. 1강부터 여기까지 다룬 사슬은 거의 전부 탄소로 만든 것이었다. 유기화합물의 세계다. 그런데 실리콘은 탄소가 아니라 규소로 만든 사슬이었다. 탄소를 벗어나는 첫걸음이자, 무기물의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다. 다음 편부터는 규소를 시작으로 가루와 금속과 미네랄—자외선을 막고 색을 입히는 무기물의 화학으로 넘어간다.